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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부정공>통덕랑귀호공휘동창묘지명(通德郎龜湖公諱東昌墓誌銘)
通德郞龜湖公諱東昌墓誌銘 余湖於湖南世家亟稱玉川氏爲趙忠獻后者世多俊賢麗季自靖有曰虔谷莊陵殉節有曰竹村父子宣廟壬辰有奉事諱宗元杖義赴難此昇平之龜山一派而元承得親事契以來每從湛軒公曾孫諸從昆季遊講其世德甚詳盖湛軒公諱鎭龍德普施廣春風四面之頌使草木知名而其曾大父有曰通德郞公者以上至侍中諱璋仕宦名節代不絶書公以下至今六七世孝友儒行奕世趾美吁盛矣繼先貽後之功其在公乎公六世孫洪燮愷悌吉士也一日抄公行略示元承曰公之懿行實蹟雜出於連世狀碣及族祖嵋狂公遺稿中班班有可攷然公歿距今二百載尙闕幽堂之銘子其爲我誌之顧義不敢辭謹按公諱東昌初諱文壽字明彦階通德其世蔭也 贈軍資監正威蓂與金晩德大器通家托契講道資益 贈詩酬情 贈參議諱允纘奉親接客饋養備給享祿綽裕人皆榮其天爵之良貴也 贈參判諱致亨僉節制使諱世行事父母盡孝處兄弟篤友居夫婦正禮交朋友久敬餘力力學事坦行所謂居家理治可移於官矣公高曾祖禰妣淑夫人海州崔氏時陟女公以 肅廟戊寅生幼頴悟少長莊重如老成知古人爲巳之學而不屑爲擧子之文性孝平居未嘗斯須忘父母家庭甚有法度祭祀賓客必躬親而不委諸人蓄散取子必廉巳而厚人敎子弟以嚴御婢僕以寬優爲鄕里矜式而其族姪顯夏實錄有曰余從學於龜湖精舍精舍即公之宅撫愛飮食無間於己子嘗遊戯仆地傷鼻流血公扶起拭之曰身體髮膚受之父母傷汝鼻是傷父母之軆也爲人子而可不愼乎云此一言百載之下亦足以髣髴其儀刑矣得壽五十八而卒時 英廟乙亥七月一日也遂葬于郡之住巖面德興村後國師峯坐亥原配恭人玉川薛氏士人晥女文良公諱恭儉后後十五年庚寅三月十九日卒別葬本面黃鷄嶝可葬洞丁坐原一男顯龜娶木川張泰毅女一女歸咸陽朴壽淵孫男二基孝基信基孝出爲從叔父顯一后曾孫男曰鎭龍女二適府使延安李台成長澤高在鎭噫以公之德之才若見需於當世則必有事業之多可觀者而乃卷懷終身且其庸言庸行之多可稱述者世遠莫究其亦可恨也巳乃爲之銘曰奕葉簪纓承其武活孝錫類爲厥祖天縱內美靳外施發短於身長于枝廣川漣漪山崷崒君子萬年保其吉 昌寧 曺元承 撰 통덕랑귀호공휘동창묘지명(通德郎龜湖公諱東昌墓誌銘) 내가 호남세가(湖南世家)를 말할때 자주 옥천 조씨를 일컬은 것은 조충헌공 후예가 대대로 어진 선비가 많아 여말불복신(麗末不服臣) 虔谷공이 있으며 莊陵 순절신 죽촌부자(竹村父子)가 있으며, 선묘임진(宣廟壬辰)에 봉사 휘 종원(奉事諱宗元)이 충의를 품고 국난에 나아가 싸웠고, 이승평의 귀산 일파로 나 원승(元承)이 친의를 맺어 계합한 이후로 항상 담헌공 증손(湛軒公曾孫) 여러 종형제와 종유하여 그 집안 세덕(世德)을 소상(昭詳)하게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담헌공(湛軒公)의 휘는 진룡(鎭龍)인데 인덕(仁德)이 두텁고 시혜(施惠)가 넓어 춘풍사면(春風四面)의 송사(頌辭)로 초목까지 혜택을 입었고, 그 증대부(曾大父)에 통덕랑 공이 있었는데 공의 이상(以上) 시중 휘 장(璋)에 이르기까지 사환명절(仕宦名節)이 대대로 사책(史册)에 끊이지 않았고 공 이하(以下) 지금 六·七세에 효우유행(孝友儒行)이 또 대대로 순미(純美)하였으니 아! 장하도다. 선대를 이어 후손에 끼친 공(功)이 바로 공(公)에게 있음이 아닌가. 공의 六세손 홍섭(洪燮)은 공손하고 착한 선비라. 一일에 공의 행장을 가지고 원승(元承)에게 보이며, 우리 선조의 사행(事行)이 누대(累代) 장갈에 보이고 또 미광공 유고중(嵋狂公遺稿中)에서는 희미하게 상고할 수 있으나, 그러나 별세하신 후 二백년에 아직 묘문(墓文)이 없으니 자네가 나를 위하여 기록하여 달라 한다. 의리상 사절치 못하고 삼가 살피니 공의 휘는 동창(東昌)이요, 처음 휘는 문수(文壽)며 자는 명언(明彥)이고, 음직(蔭職)으로 통덕랑이었다. 조(祖)의 휘는 증 참판 치형(致亨)이요, 고(考)의 휘는 첨절제사(僉節制使) 세행(世行)인데 효성을 다하여 부모를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부부간에 예로써 경대하고 붕우(朋友)를 신의(信義)로써 사귀며 여가에 학문을 힘써 일을 너그럽게 처리하였으니, 이른바 집을 정제한 후에 나라를 다스린다. 한 고인(古人)의 기풍(氣風)이 공에게 있었다. 비는 숙부인 해주최씨 시척(淑夫人海州崔氏時陟)의 녀로 숙종 부인(一六九八)년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장성하면서 노성(老成)한 사람같이 씩씩하고 후중하여 옛 사람의 수신의 학을 알고, 과거 볼 문장을 경시(輕視)하며 천성이 순효(純孝)하여 평일에 잠시라도 부모를 잊은 일이 없었고 가정의 법도가 엄격하여 봉제사(奉祭祀) 접빈객(接賓客)에는 반드시 몸소 행하고 전곡출입(錢穀出入)에 반드시 사람에게 후히하고 자제를 엄하게 가르치며, 비복을 너그럽게 거느리고 크게 향방의 모범이 되었다. 그 족질 현하(顯夏)가 쓴 실록을 보면 「내가 공의 저택인 귀호정사(龜湖精舍)에 유학 할 때에 나를 어루만져 사랑하여 음식을 같이 하기도 하였으며 장난을 하다가 땅에 넘어져 코를 다쳐 피를 흘리면 공이 붙잡아 일으켜 닦아주며, 신체발부(身體髮膚)는 부모께 받은 것이니 네 코를 다친 것이 곧 부모의 몸을 다친 것이라 사람의 자식이 되어 어찌 감히 삼가 아니하겠느냐」 하였다 하니 이 한 마디만 보더라도 백세뒤에 족히 그 의범(儀範)이 됨을 알 수 있겠다. 영조 을해(一七五五)년 七월 一일에 향년 五十八세로 별세하니, 본군(本郡) 주암면(住岩面) 덕흥촌후(德興村後) 국사봉 좌해원(國師峯坐亥原)에 안장하였다. 배는 공인(恭人) 옥천설씨 사인환의 녀(玉川薛氏士人晥女)요, 문량공 공검의 후(文良公恭儉之后)로 공보다 十五년 후 경인년 三월 十九일에 별세하여 본면(本面) 황계등 가장동 정좌원(黃鷄嶝可葬洞丁坐原)에 안장하였다. 一남 현구(顯龜)는 목천 장태의 녀(木川張泰毅女)를 취처(娶妻)하고 一녀는 함양 박수연(咸陽朴壽淵)의 처이며, 손자는 기효(基孝)·기신(基信)인데 기효는 종숙부 현일(顯一)의 후사로 출계하고 증손자는 진룡(鎭龍)이요, 녀는 부사(府使) 연안(延安) 이태성(李台成) 장택(長澤) 고재진(高在鎭)에게 출가하였다. 아! 공의 덕과 재주로써 당대에 수용(需用)하였으면 반드시 칭상할 일이 많을 것인데 이에 덕을 숨기고 몸을 마치었고 또 그 일컬어 기술할 많은 사행이 세대가 멀어 고증할 수 없어 그 또한 가히 한스럽도다. 이에 새겨 가로되, 대대로 높은 관작은 그 자취를 이은 것이요(奕葉簪纓承其武) 큰 효도가 동유에게 미친 것은 그 근본을 위한 것이로다. (活孝錫類爲厥祖) 하늘에서 풍수한 미덕을 아끼어 밖에 베풀었고 자신을 적게 발양하여 가지를 길렀다. (天縱內美靳外施發短於身長于枝) 광천에 물결이 곱고 산은 높고 길도다(廣川漣漪山崒崷) 군자 만년에 그 길지를 보유하였다. (君子萬年保其吉) 창녕(昌寧) 조원승(曺元承)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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